지정학(geopolitics)은 지리적 요인이 국제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일찍이 A. Mahan은 해군력과 물류를 합친 해양력을 강조했다. 따라서 미국이 해양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1) 함선을 건조하고, 2) 해외에 미군기지를 가지며, 3) 파나마 운하를 차지하고, 4) 하와이를 식민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그의 주장대로 행동했고 현존 최강의 국가가 되었다. 이외에도 스파이크만의 ‘심장 지역’ 이론은 봉쇄정책의 기반이 되었고, 하우스호퍼의 ‘생존공간’ 이론은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는 기틀을 제공했다.
어떤 땅, 어떤 기후에서 사느냐는 인간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다. 중국에서 지평선을 보고 사는 사람과 아마존에서 습지를 보고 사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야망, 행동의 폭, 쓸 수 있는 전략은 다르다. 중국은 수 양제가 황하와 양쯔를 연결한 운하를 만들면서 쓸만한 땅이 되었고,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이라는 대양을 끼고 있었기에 침략받지 않은 땅이 되었다. 프랑스가 오랜 기간 유럽의 강자로 군림한 것은 평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러시아나 브라질은 땅이 넓지만 쓸 수 있는 땅이 없다. 평원과 산맥, 바다의 위치, 그리고 기후가 어떤 국가를 흥하게 하기도, 망하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리가 전부는 아니다! 수 양제가 대운하를 만들지 않았다면? 미국이 루이지애나와 캘리포니아, 알래스카를 사지 않았다면? 중국과 미국은 대국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지리는 우리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지만 인간은 의지를 가지고, 기술을 발전시켜 지리의 한계를 극복해 왔다. 태초의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발원했고, 당시의 아프리카는 지금보다 살기 좋은 땅이었다. 그러나 지리와 기후에 안주한 인간과 불리함을 이기기 위해 산업혁명을 일으킨 인간으로 나뉘게 되었고, 후자가 현재 세계를 이끌어 가고 있다. 적도 주변의 국가들은 축복받은 기후와 토양 덕분에 먹고 살기는 좋지만 대국으로 성장하기는 힘들었다. 반면 북반구는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다. 중국은 해양대국이 되기 위해 인공섬을 만들고 있고, 미국도 파나마 운하, 하와이를 차지하려 애썼다. 인도와 중국을 갈라놓은 자연적 국경은 미사일이라는 신기술 덕분에 영향력이 작아지고 있다.
제목이 <지리의 힘>으로 번역된 덕에 많은 소비자들이 이 책을 세계지리 교과서나 세계사 교과서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은 교과서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국제정치학 리포트이다. 작가는 국제정치 전문 기자이며, 이 책의 부제는 <Ten Maps That Tell You Everything You Need to Know About Global Politics>로 국제정치를 10개의 지도를 활용해 설명하고 있다. 원래 제목이 <prisoners of geography>이기 때문에 <지리의 힘>보다는 <지리의 포로들> 정도가 적당하다. 즉, 작가는 지리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결국 “현재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부차적인 도구이다.
아프리카와 중동의 문제는 지리가 형성한 자연적 구분과 국경을 무시한 채 제국주의 국가들이 마음대로 그은 국경선에서 시작되었다.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서로 다른 민족과 종교를 섞었고, 자신들의 제도를 강요했다. 한번 꼬이기 시작한 운명은 더 나은 땅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되었고, 자원을 팔아먹기 위해 끝나지 않은 살육을 펼치고 있다.
작가는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갈등(미중갈등, 중동, 아프리카, 북극해, 크림반도 병합 등)을 설명하고 있다. 지리의 영향력은 크지만 그 영향력은 시간이 지나면 변하기도 한다. 중국이 인공섬을 만들면서 동중국해에 긴장이 고조되고, 북극이 녹으면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졌다. 과거에 서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크림반도에서 목숨 걸고 싸웠지만 이제는 천연가스 때문에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을 묵인한다.
이 책의 번역은 정말 끔찍하다! 역자의 학문적 성과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 이런 한국어 실력을 가지고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석사까지 취득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몇몇 문장은 구글 번역 수준으로 한국어에서 나와서는 안 되는 콤마 위치(영어에서는 , and로 쓰지만 한국어의 ~와 ~과는 전후에 콤마를 쓰지 않는다), 성문 종합 영어에서 볼 법한 수동태 문장, 바로 영어로 바꾸면 원래 문장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의 직역 문장이 너무 많다. 이 책의 저자는 파이낸셜 타임스에 글을 기고할 정도의 기자로 간결한 문장으로 때로는 훌륭한 비유를 가져다 쓴다. 따라서 직역을 하면 이상한 문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문맥에 맞춰 의역을 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 글을 읽다 보면 역자가 국제정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한국어와 영어 수준까지도 의심하게 된다. 결코 어려운 글이 아님에도 책을 몇 번이나 덮었다 열었다. 번역의 수준도 끔찍하지만 최소한의 문장부호와 수동태 문장을 바로 잡지 않았다는 점에서 출판사의 편집 능력에도 의문이 든다.
이 책이 여러 언론에 소개되면서 베스트셀러가 되고, 청소년 권장도서까지 되었는데, 과연 이 정도 수준의 글을 읽고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차라리 원서를 사서 읽는 편이 가독성이 좋을 것이라 장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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