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아이덴티티, 슈프리머시, 얼티메이텀(The Bourne Identity, Supremacy, Ultimatum)-나의 길은 내가 선택한다
나는 누구인가
빈사 상태로 바다 한가운데를 표류하던 한 남자가 구조됐다.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살았는지, 왜 총에 맞은 채로 바다에 빠졌는지… 영어와 불어, 독일어와 러시아어 등을 말할 수 있고, 엄청난 신체능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더욱 혼란스럽다. 겨우 찾아간 스위스 은행에서 그는 자신의 사진이 찍힌 여권을 찾았다. “제이슨 본(Jason Bourne)”이라는 이름을 발견한 순간, 그는 안도한다. 나는 제이슨 본이구나… 그런데 그에게는 각기 다른 이름과 국적의 여권이 여러 개 있었고, 각기 다른 나라의 돈과 권총도 있다. 더욱 혼란스럽다. 나는 제이슨 본인가 아닌가.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나는 왜 총을 갖고 있나.
Identity는 신분 또는 “정체성”을 의미한다. 에릭슨(Erikson)은 “정체성이란 용어는 자신 내부에서 일관된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과 다른 사람과의 어떤 본질적인 특성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것 모두를 의미한다”라고 말한다. 즉, 자신의 내부에서 자신에 대해 일관된 생각을 가지고, 그것을 외부 사람과 공유할 때 정체성이 구축된다. 그러나 제이슨 본은 자신이 제이슨 본이 맞는지 의문을 가진다. 이는 제이슨 본이라는 존재에 대해 내부에서 일관되게 받아들이지 못함을 보여주며,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본 아이덴티티>의 카피처럼 그는 타겟이 되기 전에는 완벽한 살인 병기로 여겨졌다(He was the perfect weapon until he became the target). 하지만 그 자신은 외부에서 인식하는 “살인 병기”라는 정체성을 거부한다.
<본 얼티메이텀>에서는 데이빗 웹이 스스로 “제이슨 본”이 되기를 선택한 과정을 보여준다. 데이빗 웹은 제이슨 본으로 거듭나려고 했지만 자신의 선택에 대한 의문과 측은지심을 버리지 못하고 임무에 실패했다. 이는 그가 완벽한 살인 병기인 제이슨 본이 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그를 제이슨 본으로 부르지만 그는 이제 제이슨 본을 거부한다. 동시에 데이빗 웹이라는 본명을 찾았지만 다시는 데이빗 웹이었던 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는 여러 개의 자아가 충돌하는 혼란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기억을 잃었던 상태에서 제이슨 본은 살아남기 위해 싸웠다. 외부 공격이 있으면 몸이 자동으로 반응했고, 살아남기 위해 도망쳤다. 방어를 위해 움직였으며, 무분별한 폭력과 살생은 되도록 피했다. 그는 혼란 속에서 점차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싸웠고, 나아가 자신이 저지른 죄를 속죄하기 위해 싸웠다.
데이빗 웹은 미국을 위해서, 미국 국민을 구하기 위해서 싸우기로 결심하고 제이슨 본이 되었다. 그것이 그에게 대의였다. 그러나 사실 그는 미국이 아닌 CIA라는 조직, 그것도 일부의 비리를 감추기 위한 살인 병기로 쓰였다. CIA는 그를 속였고, 그렇게 그의 폭력을 정당화했다. 진실을 알게 된 제이슨 본은 더 이상 남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 그는 이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움직인다.
우리는 파도에 떠밀리듯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이것이 맞는 길이라는 남의 말에 따라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한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누구인지, 어디에 서있는지, 지금의 나는 내가 만들어 온 것인지에 대해 혼란스러워한다. 지금의 자신 모습에 대해서는 다른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는다. 나의 삶의 무게는 오롯이 나만의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두 자신이 결정하고, 견뎌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