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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중화전과 석조전, 본인 촬영

 

난세에 찾아간 곳

덕수궁(德壽宮)은 원래부터 궁궐로 쓰기 위해 지은 건물이 아니다. 조선왕조의 법궁은 경복궁이었고, 임진왜란 이후 오랜 기간 창덕궁이 정궁이었다. 조선 왕조의 기틀을 세운 정도전도, 왕실의 주인들도 덕수궁 자리에 궁을 세우고, 왕이 기거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곳은 남편을 잃은 세자빈 한 씨(후에 인수대비)가 궁궐 밖에서 살던 집이었고, 성종의 형이자 인수대비의 큰아들인 월산대군이 물려받은 집이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규모도 크지 않고, 단청도 칠하지 않은, 그저 조금 큰 사대부의 집이었다.

 

덕수궁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임진왜란 시기이다. 경복궁은 물론 창덕궁까지 불타버려 갈 곳이 없었던 선조는 월산대군의 집에 몸을 의탁했다. 왕이 기거했던 곳이니 궁이 되었고, 경운궁이란 이름을 얻게 된 이 곳에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다. 광해군은 패륜이란 명목으로 폐위가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인목대비의 “인정”이 필요했던 인조는 인목대비가 있던 경운궁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인조반정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경운궁은 조선 말기에 다시 등장했다. 1895년 명성왕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일본의 위협 때문에 더 이상 경복궁에서 살 수 없었던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는 “아관파천”을 했다. 고종은 무려 1년 정도를 러시아 공사관에서 지내다가 가까운 덕수궁으로 옮겨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이후 덕수궁은 대한제국이 끝나는 날(을사조약)도 지켜보고, 고종이 승하한 후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장면도 지켜보았다.

 

이렇게 대한제국과 함께 다시 역사 속으로 가라앉았던 덕수궁은 해방 이후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석조전이 미소공동위원회의 회담장으로 이용됐기 때문이다.

 

덕수궁이 주인을 맞아 역사의 전면에 부각된 때는 난세였다. 하긴 난세에 정궁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으니 덕수궁까지 흘러 들어온 것이겠지.

 

 

궁궐 안에 낯선 건물

석어당

덕수궁 석어당, 본인 촬영

 

석어당은 덕수궁 안에 있는 2층 목조 건물이다. 궁궐 안에 있는 건물임에도 단청을 칠하지 않았는데, 때문에 전에는 이 곳이 예전 월산대군 사저라는 안내문이 있었다. 현재는 안내문의 내용이 바뀌어 월산대군 사저가 이 건물이었다는 내용은 없다. 하지만 단청이 칠해지지 않은 점, 선조 때부터 지금까지 덕수궁에 남아온 건물이라는 점에서 신빙성이 높다고 본다. 하긴 그렇다고 해도 1904년에 덕수궁 대화재 때 타 버리고 새로 지었으니 이 건물이 그 옛 건물이라고 말하기도 그렇다.

 

석어당의 매력은 단청이 칠해지지 않은 수수함에 있다. 천편일률적인 궁궐의 전각 사이에서 오래된 나무 색을 뽐내는 2층 건물은 한산 모시로 도포를 두른 선비의 모습 같다. 한여름에는 문을 모두 천정에 달아 바람이 통하게 하는데, 그 모습이 무척 시원해 보인다.

 

 

석조전

덕수궁 석조전, 본인 촬영

조선의 궁궐 안에 가장 이질적인(?) 건물이라면 석조전을 들 수 있다. 석조전은 대한제국의 전각으로 짓기 시작했고, 영국인 하딩이 디자인했다. 건물은 이오니아 양식의 기둥을 외부에 배열했고, 총 3층 규모지만 지층은 반지하에 가까우며, 실제로는 2층부터 사용된다. 안타깝게도 대한제국이 없어진 1910년에 완공되었고, 한 번도 궁궐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저 대한제국 황제에서 이왕가로 전락한 이들이 접대용으로 사용하던 건물이었다.

 

석조전 내부, 본인 촬영

 

일제 시대에는 이왕가 미술관으로 쓰였고, 해방 이후에는 미소 공동위원회의 회담장으로 쓰였다. 현재는 석조전 본관은 대한제국 역사관으로 쓰이며, 당시의 가구를 재현해 놓고, 대한제국의 역사를 문화해설사가 설명해준다. 석조전 서관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관헌

덕수궁 정관헌, 본인 촬영 

덕수궁 안의 서양 정원 같은 정관헌은 고종이 커피와 연회를 즐기던 공간이다. 대한제국 황실의 문양인 오얏꽃이 새겨져 있고, 덕수궁을 내려다볼 수 있다. 지금도 이 곳에서는 각종 문화 행사가 열린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식후 커피를 마시다

현대 사회에서 궁궐은 어떤 의미일까? 지나간 역사의 흔적, 도심 한가운데를 차지한 큰 건물, 관광자원 등 여러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덕수궁은 아픈 역사의 페이지마다 등장하지만 조선의 역사에서 그다지 중요한 공간은 아니다. 그 안에 있는 건물들의 문화적, 예술적 가치가 높은 것도 아니고, 게다가 1900년대 초에 새로 지은 건물들이다. 한국의 궁궐은 중국의 자금성에 비하면 규모가 작고, 다른 나라의 궁궐에 비하면 새로 복원한 건물들이 많아서 관광자원으로도 살짝 아쉬움이 남는다. 사극의 한 장면을 흉내 내려는 관광객들에게 사진의 배경이 될 뿐이다. 아픈 역사를 돌이켜 보는 장소이긴 하지만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덕수궁 대한문, 본인 촬영

 

2020년대 한국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덕수궁은 아픈 과거를 넘어 지친 현재를 위로해 주는 공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덕수궁은 시청역 바로 앞에 있다. 접근성이 매우 좋지만 주변에는 공무원과 회사원, 학생과 관광객으로 늘 북적인다. 게다가 시청 앞은 늘 시위대로 시끄럽다. 하지만 단돈 천원이면 도심의 복잡함에서 벗어나 덕수궁을 한 바퀴 산책하면서 여유를 즐길 수 있다. 경복궁은 너무 넓고, 모래밭만 이어지고, 창덕궁은 건물이 너무 빽빽하지만 덕수궁은 산책로도 잘 조성되어 있고, 점심 먹고 한 바퀴 돌면 딱 좋을 정도의 크기이다. 근처 직장인이라면 점심시간 관람권을 3천원 주고 구입하면 3개월 내에 10번이나 방문할 수 있다. 3천원이면 커피 한 잔 값인데, 그 돈으로 무려 10번이나 도심 속의 평화를 맛볼 수 있다.

 

공간의 용도와 효용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해간다. 피라미드가 더 이상 사후 세계의 출입문이자 무덤이 아니듯, 주인이 없는 조선의 궁궐도 더 이상 범접할 수 없는 곳이 아니다. 궁궐은 이제 모두의 눈높이로 내려와 모두의 공간이 되었다.

 

이 글은 문화재청 덕수궁 홈페이지와 관련 도서를 참조해서 작성했습니다. 이 글의 상업적 이용과 무단 도용을 금지합니다. 사진의 저작권은 사진 출처에 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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