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문화가 된다

728x90
반응형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순진한 부잣집 사모님은 왜 스파이의 아내가 되었나

1940년, 일본 고베.

라디오에는 전쟁 소식이 가득하고, 거리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돌아다니던 그때, 그곳.

 

후쿠하라 사토코는 무역상인 후쿠하라 유사쿠의 아내이다. 아무것도 몰랐던 산골소녀 사토코는 부유한 남편 덕에 부잣집 사모님이 되어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만주에 다녀온 남편이 관동군의 만행을 고발하러 미국에 간다고 한다. 이국 땅에서 죽은 사람의 목숨이 가족의 행복보다 소중한가? 일본 땅에 사는 동포의 평화보다 중요한가? 남편은 정의의 사도인가 아니면 불륜남인가? 사토코는 불안하다.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다 믿어버린다. 당신이 스파이라면 나는 스파이의 아내가 되겠다. 나의 남편은 정의를 위해 싸우는 스파이다, 나는 그의 아내로 평생을 함께 하겠다.

 

 

불안이 목을 조여 온다

미치지 않고 어떻게 버티겠어요

사토코가 선택한 것은 정의였을까 아니면 후쿠하라 유사쿠라는 남자였을까? 유사쿠가 731 부대의 생체실험 이야기를 꺼냈을 때, 사토코는 강하게 부정하면서 “개인의 행복”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 그녀가 유사쿠가 녹화해 둔 필름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그 필름은 노트의 몇 장면을 찍은 것에 불과하며, 결정적인 증거도 아니다. 따라서 그 필름을 보면서 그녀가 정의의 투사가 되었거나 남편의 진의를 100% 믿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남편이 미국에 간다면 “나와 함께” 가게 만들자, 그의 주변에 나만 남겨두자고 생각한 게 아닐까? 그녀가 정의를 선택했다면 굳이 노트 원본을 증거로 제출하고, 조카인 후미오를 밀고해야만 했을까? 심지어 자신을 좋아하는 소꿉친구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기모노까지 입고서? 그 일로 유사쿠는 용의 선상에서 제외된 것이 아니라 더 심한 감시에 노출됐다. 사토코는 가장 중요한 증인인 히로코가 없어진 상황에서, 후미오와 노트가 사라진다면 남편이 자신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보았다. 그것이 사토코에게는 행복이고, 정의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사실 그녀는 계속 불안해했다. 산골 소녀가 부잣집 사모님이 되어 누리는 안락한 삶이 무너지지 않을까? 남편은 왜 만주에 간다고 하는 것일까? 전쟁이 나면 지금 이 생활은 어떻게 될까? 남편이 만주에서 데려온 여자에 관해 전해 들었을 때, 사토코는 흔들리는 전차 안에서 같이 흔들렸고, 쏟아져 내리는 햇빛 속에서 무너졌다. 불안은 남편에 대한 집착으로 바뀌었고, 남편과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믿음으로 바뀌었다. 그것을 사랑이라 믿었다. 시대가 미친 것일 뿐 자신은 미치지 않았다고 믿었다. 남편은 살아있다고 믿었다. 사토코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광기를 덮었다.

 

 

그건 사랑이었을까?

유사쿠는 군국주의 일본이 싫었다. 댄디한 양복, 위스키, 무성영화, 그리고 체스 같은 서구 문물이 좋았다. 길에 돌아다니는 군인이 불편하고, 만세를 외치는 민중이 거북했다. 어서 빨리 미국으로 떠나고 싶었다.

 

유사쿠는 자신은 스파이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그는 영국인 친구가 체포됐을 때, 이미 바꿔치기로 사용할 영화를 찍고 있었다.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만주에 갔다가 731 부대의 만행을 우연히 목격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중요 증인과 증거물을 모으기 위해 만주에 갔을 것이다. 무역상이란 직업과 영화 촬영이란 취미는 그 과정에서 유용하게 유사쿠를 포장했다. 유사쿠는 후미오가 체포됐을 때 아내에게 분노했다. 하지만 아내의 주장에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사토코 때문에 모두가 위험에 빠졌고, 상황은 더욱 안 좋아졌다. 그럼에도 “아내를 사랑하니까”, 아내와 함께 한 것일까?

 

 

유사쿠는 처음부터 사토코와 후미오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영화 촬영을 핑계로 금고 번호를 사토코에게 알려주었고, 사토코가 보는 앞에서 증거를 금고에 넣었다. 자신의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그리고 좋은 추종자를 만들기 위해 후미오와 함께 만주에 갔다. 유사쿠에게는 사토코도 후미오도 체스판에 말에 불과했다. 사토코의 밀항을 밀고한 것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일본에 남겨두려는 게 아니라 감시의 시선을 돌리고, 사토코를 떼어놓기 위함일 수 있다.

 

그는 빨리 미국에 가고 싶었다. 침몰해 가는 일본에서 운명을 같이하고 싶지 않았다. 관동군의 만행은 좋은 핑계였고, 사토코와 후미오는 좋은 말(馬)이었다. 그뿐이었다.

 

 

 

모두의 광기를 짚어내다

감독은 빛과 어둠을 이용해서 인물의 심리를 그려내고 있다. 원래 TV용으로 8K로 찍었던 필름을 영화용으로 2K로 바꿨다고 하는데, 자연광을 많이 사용해 인물의 그림자를 담아낸다. 햇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대저택은 유사쿠가 찍은 필름 때문에 어둠으로 바뀐다. 사토코는 그늘에 숨어서 유사쿠를 지켜보는데, 이는 불안과 집착을 드러낸다. 마지막에 아직 동이 트지 않은 해변에서 사토코는 겨우 짐승 같은 울음을 쏟아낸다.

 

사토코는 젊고, 아름다운 사모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즐기고, 유사쿠는 군국주의 일본의 모습에서 시선을 거둔다. 사토코의 행복은 흔들리는 전차처럼 불안하게 흔들리고, 이를 감추기 위해 빌려온 고급 자동차에서는 과도하게 즐거워한다. 유사쿠는 아내의 “스파이 놀이”에 기꺼이 동참한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1940년, 일본.

개인이 미쳤고, 국가가 미쳤고, 세계가 미쳤다. 감독은 모두의 광기를 드러내는 도구로 731 부대의 만행을 소재로 썼다. 정의와 사랑을 말하지만 사실은 불안과 집착으로 가득 찬 “스파이의 아내”, “사랑”이란 명목으로 그런 그녀를 철저하게 이용한 스파이.

 

아무것도 믿을 수 없고, 미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었던 그때, 그곳.

공유하기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