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디 드라마(Trendy drama)는 젊은이들의 도시 생활, 패션, 사고방식 등을 다루는 드라마로 일본에서 유래됐다. 1990년대는 트렌디 드라마의 전성기였다. 경제성장으로 소비 수준이 향상됐고, 많은 젊은이들이 직장을 찾아 대도시로 몰려들었으며, 일하는 여자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남녀관계가 수직적인 관계에서 수평적인 관계로 변하면서 남녀 간의 우정이 젊은이들 사이에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롱 베케이션(long vacation)은 일본 트렌디 드라마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1996년 4월부터 6월까지 후지 TV에서 방영했는데, 당시 ‘드라마 방영 시간에는 길에서 OL(Office Lady)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할 만큼 큰 인기를 얻었다. 톱스타였던 야마구치 토모코(山口智子)와 당시에는 라이징 스타(rising star)였으나 지금은 명실상부한 일본 최고의 톱스타인 기무라 타쿠야(木村拓哉)가 주인공으로 나오고, 다케노우치 유타카(竹野内豊), 료(りょう), 마츠 다카코(松たか子), 이나모리 이즈미(稲森いずみ) 등이 출연했다. 앳된 히로스에 료코(広末涼子)도 볼 수 있다.
롱 베케이션은 트렌디 드라마답게 90년대 말 도쿄에 사는 젊은이들의 사랑과 우정, 패션과 음악을 다루고 있다. 흔한 사랑 이야기와 유행은 시간이 지나면 기억에서 잊혀진다. 그러나 롱 베케이션은 단순히 젊은이들의 사랑놀이와 유행만 다룬 게 아니라 청춘이라면 피해 갈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좌절을 다루고 있기에 다른 트렌디 드라마와 달리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30살 하야마 미나미(야마구치 토모코)는 결혼식날 남자친구가 갑자기 사라져 전통 혼례복을 입은 채로 그를 찾아다닌다. 그가 살던 집에 와보니 그는 이미 다른 여자와 도망갔다. 아직도 일본에서는 여자가 결혼하면 ‘결혼 퇴사(寿退社)'라고 하여, ‘당연히’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심지어 90년대는 어땠을까? 미나미도 결혼을 계기로 모델 일을 그만두려고 했는데, 인생을 책임져 준다고 생각했던 결혼이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났다. 미나미는 고향에 돌아가는 대신 도쿄에 남아 일을 찾지만 모델 외에는 경력도 없고, 나이도 어중간해서 계속 실패한다.
미나미는 좌절한다. 나는 왜 버림받았을까?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24살 세나 히데토시(기무라 타쿠야)는 일본 예술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했지만 재능의 한계라는 벽에 부딪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대학원 입시에도 떨어지고, 콩쿨에도 떨어지면서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어린 제자에게는 즐거운 마음으로 피아노를 쳐야 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피아노를 두고 방황한다.
세나는 불안하다. 피아노를 치는 건 좋지만 과연 피아노로 평생 먹고살 수 있을까? 나에게 재능이 있는 걸까? 헛된 꿈을 꾸는 게 아닐까?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 많은 청춘들이 공감했고, 아픈 청춘이 싫다며 분노하기도 했다. 바꿔 생각하면 아프기 때문에 청춘이 아니라 청춘이라서 더욱 아픈 게 아닐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미래를 알 수 없기에 불안하고, 능력에 한계를 가졌기에 좌절한다. 다만 청춘은 경험치가 적기 때문에 미래가 더욱 불안하게 느껴지고, 자신의 한계를 가늠하기 어렵기에 더욱 크게 좌절한다.
세나와 미나미도 좌절하고, 불안해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려고 노력한다. 미나미는 사진을 배우기 시작하고, 세나는 자기 만족이 아닌 누군가를 생각하며, 그에게 들려주기 위해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다.
세나는 좌절한 미나미에게 ‘신이 주신 긴 휴가’라고 이야기해준다. 모든 것이 잘 안될 땐 휴가라고 생각하고 쉬어가라고. 미나미는 피아노를 포기하려는 세나에게 작은 기적을 보여준다.
모든 것이 엉망이라고 생각될 때, 하는 일마다 실패할 때,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라 카메라 프레임 밖에서 잊혀지는 조연이라는 생각이 들 때,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아니라 그 별을 돋보이게 하는 어둠이라는 생각이 들 때, 사람은 흔들리고, 무너진다. 그러나 세나와 미나미는 서로를 믿어준다. 누구보다 큰 날개를 가졌다고, 누구보다 빛난다고, 다시 일어나 새로 시작하면 된다고.
청춘은 늘 불안하고,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한다.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 청춘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건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 지칠 때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