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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1. 신카이 마코토가 세상을 보는 방식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전작 " 너의 이름은(君の名は。)"이 메가 히트를 치면서 감히 미야자키 하야오를 이을 일본 애니메이션의 기둥으로 평가받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1) 인물보다 배경에 강하며, 2) 소년의 순수한(이라고 쓰고 오글거리게 유치한) 사랑을 그리며, 3) 이세계(異世界)를 다룬다.

 

1) 인물보다 아름다운 배경

신카이 감독이 그려내는 배경은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빛의 마술사"란 별명에 어울리게 빛이 쏟아지면서 바뀌는 사물의 미묘한 차이를 그려내는데, 마치 인상파의 작품을 보고 있는 것 같다. 특히 비가 오는 장면(언어의 정원, 날씨의 아이)은 압권이다! 인물이 없다면 이게 사진인지 그림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배경과는 달리 압도적으로 인물 작화의 수준이 떨어진다. 최근에는 인물 작화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있을 정도이다. 이는 인간보다 주변 사물을 주의깊게 관찰한 감독의 유년이 반영된 결과라고 본다.

 

감독은 나가노 출신이지만 도쿄에서 학교(주오대학)를 나왔고, 직장을 다녔다. 그에게 있어서 도쿄는 성년이 되어 만난 미지의 세계이자,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대도시이며, 이제는 오랜 생활 터전이기도 하다. 이번 영화에서 그는 도쿄를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냈다. 끝없이 이어지는 언덕길, 야마노테센, 신주쿠의 뒷골목, 니시신주쿠의 고층 빌딩들, 신주쿠가이엔, 시바코엔, 오다이바... 그의 작화에서는 도쿄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그가 오랜 시간 외롭게, 조용히 바라보았던 도쿄를 그려낸 것이리라.

 

 

2) 소년의 순수한 사랑-인간의 가능성을 믿는다.

감독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고등학생 정도의 소년들이다. 그들은 수줍고, 이성에게 적극적인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일단 사랑에 빠지면 꽤 저돌적인 면모를 보이는데, 이것이 어찌보면 순수하고, 어찌보면 유치해서 견딜 수가 없다. 게다가 극을 이끌어가는 소년의 독백이 어우러지면 손발이 오글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소년들은 무모한 선택을 할 수 있고,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이런 인물상은 감독이 인간의 순수함, 가능성을 믿기 때문에 등장할 수 있었다고 본다.

 

3) 서로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

감독의 작품 속 인물들은 서로 다른 세계에 놓여있다. "너의 이름은"에서는 아예 시공간이 어긋나 있었고, "별의 목소리"에서도 우주 저 멀리 떨어져 지낸다. 동일한 시공간에 놓여있더라도 나이, 신분 등의 차이를 크게 설정한다.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감독은 우주, 무속신앙 등 현실과는 다른 세계를 동경하고, 오랫동안 생각해 온 듯 하다. 그리고 다른 세계가 연결되면서 발생하는 스파크, 기적 등을 중요하게 다룬다.

 

2. 재난을 대하는 자세의 변화

전작인 "너의 이름은"에서는 유성의 파편이 동네 하나를 몰살시키는 재난이 나온다. "날씨의 아이"에서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비가 등장한다. 비는 잠시도 쉬지 않고 내린다. 벼룩시장을, 웨딩 촬영을, 운동회를, 불꽃놀이를 취소하게 만든다. 그리고 결국 도쿄를 잠기게 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도 계속 내리는 비를 보며, 하늘이 노했다고 말하고, 무속신앙에서 근거를 찾으며, 희생양을 찾는다. 히나는 비를 멈추게 하는 능력을 가졌고, 히나의 희생으로 실제로 비가 멈추게 된다.

 

인간은 오래 전부터 재난을 마주했을 때, 상황을 개선하기 보다 희생양을 찾아 왔다. 사실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 시대의 인간에게 자연 재해는 너무나도 큰 힘이고, 그 앞에서는 무력해질 수 밖에 없었다. 희생양을 만들면서 대중의 분노를 억누르고, 통치의 명분을 만들 수 있다. 뱃사람들이 인당수 용왕에게 바칠 제물로 심청이를 사고, 페스트를 유대인들이 퍼트렸다고 주장하며, 관동 대지진 때는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고 했다. 그렇게 분노를 돌릴 대상, 나 대신 희생될 제물을 원했다.

 

"날씨의 아이"에서도 사람들은 이 비를 그칠 수 있다면, 한 사람만 희생해서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이라는 말로 희생양을 정당화시킨다. 벤담의 공리주의의 망령은 희생양을 찾는다. 하지만 그것이 최선인가? 희생양의 불행은 나머지 사람들이 감내해야 할 불편의 크기보다 작은가?

 

나는 이 영화가 재난에 대처하는 방식에서 봤을 때 전작인 "너의 이름은"보다 진보했다고 본다. 물론 전작에서의 재난은 수많은 과학자들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고, 그냥 도망치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다. 인간은 여전히 무기력하다. 그저 열심히 뛰어서 도망치라고 말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는 히나의 희생으로 영화가 끝나지 않는다. 호다카는 이를 거부한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현실에 안주하게 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래서 공무집행방해의 도주극을 펼치며, 히나를 구하러 간다. 그리고 히나에게 "이제 너를 위해 기도하라!"고 한다.

 

결국 히나가 돌아오고, 도쿄에는 다시 비가 온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비와 함께" 사는 법을 배웠다. 아이들은 빗 속에서도 뛰어놀고, 비에도 젖지 않는 불꽃놀이를 본다. 도쿄는 상당부분 물에 잠겼지만 사람들은 높은 곳으로 이사를 가거나 새로 다리를 짓는다.

 

인간은 재난을 받아들이고, 재난에 적응하여 살게 된 것이다. 사실 인간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 날씨따위 신경쓰지 않고 일상생활을 누리게 된 건 겨우 100여 년 남짓이다. 정말 오랜 시간 동안 인간은 자연에 휘둘려왔고, 그 안에서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나아질까 궁리를 하면서 살아왔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생활이 이루어진 것이다. 인간이니까 어떻게 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다.

 

희생양을 찾는 것은 쉬운 답이다. 하지만 인간이니까 조금 천천히 돌아가더라도 더 나아지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이번 한번은 희생양으로 끝났지만 언제까지 그럴것인가? 인간이니까 고민해야 한다. 인간이니까 노력해야 한다. 재난에 대한 이런 태도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희망을 이야기 한다.

 

3. 세상은 원래 미쳐있어. 그러니까 괜찮아.

영화 말미에 스가가 호다카에게 "세상은 원래 미쳐있다. 그러니 책임감 따위 느끼지 말라"고 한다. 이건 히나를 구해내면서 그 반대급부로 세상을 망쳤다는 죄책감을 혹시라도 갖게 될까 건넨 이야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호다카는 자신이 세상을 바꿨다고 믿는다.

 

세상이 원래부터 미친 것도 맞고, 호다카가 세상을 사는 방법을 바꾼 것도 맞다. 자연이란 원래부터 인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자연 재해에 대해 적응하고, 진보하게끔 계기를 제공한 것도 맞다.

 

코로나로 모든 일상이 바뀌어버린 지금, 재난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본다. 전염병은 무섭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미워하게 만든다. 학교도 갈 수 없고, 모임도 가질 수 없다. 특정 지역 사람이라는 이유로 치료를 거부하기도 하고, 특정 집단이 전염의 원인이라고 미워하고, 차별한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하지만 인간이니까 이겨낼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정말 괜찮아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일상의 모습은 이전과 달라질 것이다. 인간은 상황에 적응하고, 어려움을 해결할 것이다. 마스크가 일상으로 들어오고, 신체의 거리는 조금 멀어지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고민할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세상을 바꿔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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