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904호인 청동 투구는 기원전 5-6세기경에 그리스 코린트 지방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코린트 양식 투구라 부르지만 건축사에서 말하는 코린트 양식 기둥과는 조금 의미가 다르다. 이 투구는 1875년에 독일 고고학 교수인 쿠르티우스가 그리스 올림피아 신전을 발굴하면서 발견됐다. 코린트 양식의 투구는 초기에는 머리에서 목까지 일직선으로 덮는 형태가 많았지만 이후에는 이 투구처럼 목부분이 나팔꽃처럼 퍼지게 만들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신전이나 기념비에 이런 투구의 모습이 많이 그려졌는데, 원형 그대로 발굴된 것은 드물다고 한다. 특히 보물 904호는 앞부분이 약간 깨진 것을 제외하면 거의 완벽한 상태라고 한다.
기원전 그리스 투구, 심지어 보존 상태도 좋은 유물이 왜 한국의 박물관에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보물로 지정된 것일까?
제11회 올림픽은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렸다. 그리고 이 대회의 남자 마라톤 부문에서 당시 세계 신기록인 2시간 29분 19.2의 기록으로 우승한 사람은 손기정 선수였다(3위는 남승룡 선수였다). 안타깝게도 1936년이면 일제 강점기. 두 선수는 일본 국적으로 올림픽에 나갔고,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었다. 그런 이유로 올림픽에서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하고도 고개를 떨군 채 바닥만 바라보았다.
당시에는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에게 그리스가 자신의 유물을 전해주던 관행이 있었다고 한다. 마라톤이란 종목이 그리스 마라톤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를 전하기 위해 그리스 병사가 40km를 뛰어간 것에서 유래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올림픽의 꽃이라 하면 예나 지금이나 마라톤이 아닐까? 스포츠의 세계에서 어떤 것이 더 쉽고, 어렵겠는가만은 묵묵히 달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마라톤이야말로 어떤 속임수도 통하지 않은 자신과의 싸움을 보여준다.
이 투구는 당시 그리스가 11회 올림픽의 마라톤 우승자를 위해 준비한 유물이었다. 하지만 올림픽 위원회가 올림픽에 참가하는 아마추어 선수에게 메달 이외의 부상을 수여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려 당시 손기정 선수는 이 유물을 받을 수 없었다. 손기정 선수는 자신에게 이런 선물이 있는지도 모르고 귀국했고, 일본은 피지배국의 국민의 권리까지 챙겨주지 않았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손기정 선수는 자신에 관한 기사를 보다가 이 투구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당시 이 투구는 독일의 샤로텐부르그 박물관에 “제11회 마라톤 우승자를 위한 투구”라는 이름으로 전시되고 있었다. 손기정 선수는 반환을 요청했지만 독일 올림픽위원회가 완강하게 거부했다고 한다. 심지어 원본 대신 복제품을 주겠다는 제안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베를린 올림픽 50주년을 기념해 1986년 겨우 돌려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손기정 선수는 무려 50년 만에 어렵게 돌려받은 투구를 국가에 기증했다. 그는 “이 투구는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 투구는 기원전에 만들어진 고대 그리스 유물로 보존 상태가 뛰어나다. 하지만 그것이 한국 사람인 우리에게 주는 가치는 얼마나 될까? 오히려 세계 신기록을 세우고 우승을 했음에도 식민지 백성이라 맘껏 웃지 못했던 손기정 선수, 그리고 이 유물을 다시 돌려받기까지의 투쟁의 역사가 우리에게는 더 큰 울림을 준다.
유물의 가치는 무엇으로 결정될까?
제작시기? 조형미? 유물이 가진 사연?
이 그리스 투구가 한국의 보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손기정 선수의 피, 땀, 눈물”이 담긴 우승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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