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문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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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최근 사전을 읽어본 적이 있나요? 사전을 ‘읽다’니 무슨 소린가 싶으십니까? 예전에는 외국어를 배우든, 책을 읽든 늘 사전을 곁에 두고 모르는 말을 찾아보곤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엔 인터넷에 검색하면 뭐든지 쉽게 알 수 있는 세상이죠. 이제 사람들은 무거운 종이사전이나 업데이트가 필요한 전자사전을 들고 다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전 자체가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는 결과도 분명 어떤 사전의 내용이고, 누군가는 그 내용을 만들어야 합니다. 게다가 사전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가지게 되는 많은 질문에 대답해 줍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그런 말 뜻을 이해하고, 어떤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그 뜻을 공유하게 된 것일까요? 사전은 단순히 두꺼운 책이 아니라 ‘말을 통해 세상에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입니다. 따라서 사전을 만든다는 것은 그만큼 신중하고, 무거운 일이며, 동시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그런 이유로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의 어깨는 무겁고, 발걸음은 그만큼 느려지지만 그들의 그림자는 오래도록 역사에 드리워집니다.

 

 

<행복한 사전>은 미우라 시온(三浦しをん)의 소설 <배를 엮다(船を編む)>를 원작으로 해서 만든 영화로 출판사에서 국어사전을 만드는 과정을 그립니다. 영화의 제목인 <배를 엮다>는 “사전은 말의 바다를 건너는 배, 편집자는 그 바다를 건너는 배를 엮어 간다(書は言葉の海を渡る舟、編集者はその海を渡る舟を編んでいく)”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사전의 이름도 '바다를 건넌다'는 ‘대도해(大渡海)입니다. 사전을 만드는 일은 말을 모으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그런 다음 그 말의 의미를 정합니다. 너무나 당연하게 쓰는 ‘오른쪽’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왼쪽의 반대라는 표현은 순환논리가 되고, 다시 왼쪽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채택되지 않습니다. 영어로 right라는 설명도 부연일 뿐 중심 의미가 될 수 없습니다. 편집부는 ‘아날로그 시계에서 3이라는 숫자가 놓인 방향’이라는 설명을 채택합니다. ‘오른쪽’이란 단어를 설명할 때에도 엄청나게 많은 논쟁이 이어졌는데, ‘사랑’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사전에 들어갈 수 있는 단어와 결국에 실리지 못한 단어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생각만 해도 아득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국립국어원이 만든 표준국어대사전이 압도적인 지지를 얻고 있지만 일본은 이와나미쇼텐이나 쇼가쿠칸 등 출판사에서 만든 다양한 사전이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같은 단어도 사전마다 설명이 다른데, 이는 그들이 존중하는 가치를 드러냅니다. 예를 들어 “가족”에 대해 어떤 사전은 전통적인 의미를 채택해 부모와 자식으로 이루어진 혈연 공동체라고 설명하지만 어떤 사전은 성별, 나이에 관계없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애정 공동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은 사람의 정신을 반영하며, 그 정신을 만들기도 합니다.

 

<말모이>는 일제강점기에 실제로 있었던 “조선어학회” 사건과 “조선말 큰사전”에서 모티브를 얻은 영화입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결국 말과 글을 빼앗긴 시대에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입니다.”라고 말하며 조선어를 모았습니다. 전국에서 편지로 말을 보내주지만 쉽게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흐드러지게 많은 “민들레”들이 모여 조금씩 사전을 만들어 나간 가슴 아픈 기록입니다.

 

<프로페서 앤 매드맨(The Professor and the Madman)>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옥스퍼드 사전” 편찬 프로젝트에 관여한 실존 인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학위는 없지만 수십개의 언어에 능통해 사전 편찬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된 제임스 머레이(James Murray) 교수와 전쟁의 상처 때문에 미쳐버렸지만 풍부한 예문을 계속 제공해주는 전 군의관 윌리엄 마이너(William Chester Minor)의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에도 사전 편찬을 위해 많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받아 말을 모았다고 합니다. 누가 교수이고, 누가 미쳤을까요? 너무 똑똑한 그들이 미치지 않으면 결코 해낼 수 없는 일 아니었을까요? 심지어 사전 편찬에 대해 회의적인 목소리도 많아서 일의 진행은 더욱 지지부진했습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사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렇게 많은 '말'을 모아야 합니다.

 

옥스퍼드 사전은 초판이 나오기까지 무려 71년이 걸렸습니다. <행복한 사전>에서도 ‘대도해’를 만드는데 13년이나 걸렸습니다. 사전편집부의 신입사원은 “13년 동안이나 뭘 한 거냐”라고 묻습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사전 편집 작업은 달팽이가 기어가는 것보다 답답한 일이겠지요. 사전은 모든 이에게 길을 알려줘야 하기에 신중하고, 정확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속도에 반응하기보다 진리를 담는 그릇, 그것이 사전(辭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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