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문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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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YES24

 

불편한 이야기를 쓴다

바바라 에런라이크(Barbara Ehrenreich)는 ‘사회에서 불편하다고 여겨지는 주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글을 쓴 저널리스트이다. 그녀는 책상머리에서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는 엘리트들과 다르게 현장에 뛰어들었고, 실제로 3년간 워킹 푸어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노동의 배신(Nickel and Dimed)>을 썼다. 이 외에도 <건강의 배신(Natural Causes)>, <희망의 배신(Bait and Switch)>, <긍정의 배신(Bright-sided)> 등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지지 않기 위해 쓴다(Had I Known: Collected Essays)>는 그녀가 그동안 여러 매체에 기고한 칼럼을 엮은 것이다. 비교적 최근 글부터 30-40년 전에 기고한 글도 있는데, 몇십년 전에도 문제가 되었던 것들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논의된다는 사실에 기시감이 느껴진다.

 

빈곤에 대하여

“열심히 일하셨나요? 더 가난해지셨습니다(Nickel-and-Dimed: On (Not) Getting By in America)”는 작가가 키웨스트 지역의 호텔과 레스토랑에서 한 달간 저임금 노동자로 버텨낸 기록이다. 그녀는 이 체험을 통해 최저임금만으로 살아낼 수 없음을, 아니 일하면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현실을 고발했다. 일터에서 가까우면 집세가 비싸고, 보증금을 마련할 수 없으면 월세보다 비싼 주세를 내면서 모텔방이나 트레일러를 전전해야 한다. 건강보험이 없어서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그대로 건강상태가 나빠지면 해고당한다. 한번 빈곤의 늪에 빠지면 허우적거릴수록 더욱 빠져든다.

 

최저임금은 민감한 문제다. 저소득층은 최저임금 자체에만 의존하여 살아가기 때문에 그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저임금이 올라야 한다. 그러나 고소득층이 최저임금 상승을 적용받으면 기본급이 올라가고, 각종 수당이 동반 상승된다. 이미 건강보험과 여러 복지 제도의 틀 안에 있는 그들에게까지 최저임금 상승의 혜택이 돌아가기 때문에 사회 전체적인 지출이 커지게 된다. 지역 간에 최저임금이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도 문제다. 키웨스트 지역에서는 최저임금만으로 살 수 없지만 차를 타고 50km 밖으로 나가면 비교적 적은 보증금으로 방을 구할 수 있었다. 일본의 경우 지역마다 최저임금이 다르다. 도쿄, 오사카 같은 지역에서는 시간당 1000엔을 받는 일이 지방으로 가면 800엔 대로 떨어진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전국의 최저임금이 같다. 최저임금 8천원을 받아서는 서울에서는 생활이 어렵지만 지방에서는 그럭저럭 살 수 있다. 물론 지방에서는 8천원을 주는 일자리가 도시만큼 많지 않다는 것이 단점이지만. 경제학에서는 노동의 질이 균일하다고 보고, 철저하게 수요와 공급에 입각해 임금이 상승하면 노동이 이동해 지역 간 임금이 같아진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지역간 이동을 방해하는 것들(주거, 교육, 지인, 문화차이)이 많고, 노동의 질도 균일하지 않기 때문에 임금 문제가 더욱 복잡해진다. 더 많은 고용기회를 잡기 위해 도시에 붙어있지만 도시에서는 일하면 일할수록 가난해진다. 지방에서 가만히 굶어 죽느냐, 도시에서 발버둥 치다가 굶어 죽느냐 아니면 아메리칸드림의 주인공이 되느냐… 인간은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해 더욱 슬프다.

 

 

능력주의를 추종하는 미국이지만 빈곤층을 구하기 위한 여러 복지제도를 갖고 있다. 그러한 제도들은 일반적으로 무임승차를 방지하기 위해 여러 진입장벽을 갖고 있는데, 그 때문에 진짜 복지가 필요한 사람이 배제되고, 복지정책을 받기 위해 굴욕감을 느끼게 만든다. <밥벌이로서의 글쓰기>에서도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푸드스탬프를 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작가가 나온다. 한편으론 술과 마약에 쩔어있는 노숙인을 구조해 치료하는데 연간 몇만 달러를 쓰기도 한다. 뉴욕시는 코로나 팬데믹 동안 노숙인을 시내 호텔에 체류하게 하면서 그 숙박비를 시에서 부담했다. 백신 접종이 진행되면서 뉴욕시가 그들에게 호텔에서 퇴거하라고 하자 노숙인 연대가 뉴욕시를 고발했다. 노숙인이 노숙인 쉼터가 아닌 시내 호텔에 머문 것은 뉴욕시의 호의다. 그러나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것처럼 노숙인들은 타인의 세금을 쓰면서도 당연히 고급 시설을 요구했다.

https://www.chosun.com/international/us/2021/07/12/AK7GTYZ4LNHIJBWI3HHTKNQVJY/

 

“방 못 빼” 호텔서 나가라는 뉴욕시 명령에 노숙인들 반발

 

www.chosun.com

 

한편 돈을 버는 직업이 있으면 복지혜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돈을 받지 못하는 자원봉사를 전전해야 하는 부부의 이야기도 나온다. 복지제도는 이렇게 허점이 많다.

 

 

작가는 중산층의 몰락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인다. 그동안 진보 지식인들은 블루칼라 백인들의 몰락을 외면했는데,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겨우 그들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힐빌리의 노래>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블루칼라 백인들은 소득과 희망을 모두 잃었고, 이들의 몰락은 미국 중산층의 붕괴를 의미했다. 미국은 양극화가 심한 사회이며, 그러한 불평등이 이미 사회적으로 용인되어 있지만 “Occupy Wall St.” 시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제는 세대 간의 불평등이 심해지고, 사다리 자체가 사라진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절망은 주요 질병이자 사망 원인이 되었고, 소득뿐 아니라 가치관까지 양극화된 사회가 되었다.

작가는 이전에는 여러 유명 매체에 단어당 2달러씩 받으며 이런 불편한 주제에 대해 글을 쓸 수 있었지만 요즘 작가들의 상황은 매우 나빠졌음을 인정한다. 글을 써서 올릴 수 있는 플랫폼은 늘었지만 그 글에 대해 정당한 값어치를 제공하는 매체는 줄었다. 기존 매체도 기자와 저널리스트를 해고하고, 프리랜서 작가에게 배당되는 예산도 대폭 줄였다. 요즘 작가들은 최저임금을 받는 부업(또는 전업)을 구하지 못하면 최소한의 생계도 유지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불편한 주제를 거침없이 쓸 수 있는가? 약간의 고료라도 받으려면 소비자의 구미에 맞춘 가벼운 글만 쓰게 된다.

 

 

젠더에 대하여

작가는 페미니스트지만 페미니즘을 무조건 옹호하지는 않는다.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서 미국 여군들은 이라크 남성 포로들을 나체로 만들어 손가락질하고, 조롱하는 사진을 찍었다.

https://news.joins.com/article/337015

 

[틴틴 월드] 미군, 이라크 포로 학대로 지구촌이 시끄러운데

▶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 수감된 포로들이 지난 10일 아침 점호를 받기 위해 모여 있다. [아부 그라이브 AP=연합] 알몸이 된 이라크인 포로들을 피라미드처럼 쌓아놓고 미국 여군이 남자

news.joins.com

 

 

이 사건은 여성을 일방적인 피해자로 보는 페미니즘의 전제 조건을 정면으로 부정했고, 여성이 남성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할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양한 종류의 페미니즘 중 하나가(아니 특정한 종류의 순진한 페미니즘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부 그라이브에서 죽고 말았다. 남성은 영원히 악행을 저지르는 주체, 여성은 영원히 피해만 입는 대상으로 보고,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 폭력을 모든 부당함의 뿌리로 보는 페미니즘 말이다. 강간은 반복적으로 전쟁의 도구로 사용되었고,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전쟁을 강간의 연장으로 보았다. 적어도 우리는 남성의 성적 가학성이 인류의 비극적인 폭력 성향과 관련 있다는 증거를 확보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여성의 성적 가학성을 목격하기 전의 이야기다.-266p

 

미투 사건으로 한창 시끄러울 때도 작가는 사건의 이면을 들춘다. 미투를 제기하는 주체가 특히 미국에서는 일반인이 아니라 유명 여성들이었는데, 실제로 성희롱과 성폭행에 일상적으로 노출된 저소득 여성들의 문제는 공론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성희롱 담론은 사회 계층 면에서 크게 왜곡되어 있다. 유명한 여성 배우들의 경험을 다루는 기사와 글은 너무 많은데 비해 동네 식당의 웨이트리스들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적다.
왜일까? 무엇보다도 대부분의 노동자 계층 여성은 홍보 담당자나 변호사를 고용하지 않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친구도 없기 때문이다(중략). 이 여성의 대부분은 자신의 경험을 공개하지도 않는다. 시간당 8달러에서 10달러를 버는 사람은 새 직장을 찾기까지 걸리는 몇 주 동안을 아무 수입없이 버틸 수가 없다. 적대적인 근무환경에 대해 불만의 기색을 보이기만 해도 태도 불량 등의 이유로 해고될 수 있고, 이는 합법이다.-276p

 

여성성에 대해서만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남성성에 집착하는 사회, 미투 운동이 드러낸 계급과 가부장제의 민낯을 거침없이 다룬다.

 

 

몸과 마음, 힐링에 대하여

작가는 유방암 환자이기도 하다. 유방암이라고 진단을 받으면서부터 암과 건강에 관련된 세계에 들어선다. 이 세계에서는 암은 마케팅 도구로 이용되고, 한편으론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은 죄악시된다. 작가는 자기계발서의 유행 때문에 건강조차도 인간의 의지로 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세상에 일갈한다.

 

그러나 건강과 건강 제일주의는 다르다. 합리적인 목표로 건강을 생각하는 것과 초월적 가치로 건강을 생각하는 것도 다르다. 건강과 도덕성을 혼동하면서 우리는 더 신경질적으로 되고, 참을 줄도 더 모르게 됐고, 궁극적으로 개인이 제어할 수 있는 한계 밖에 놓인 질병의 근원을 대면하는 데 더 익숙지 않게 됐다. 예를 들어 희생자를 비난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건강 제일주의의 부작용이다. 건강이 우리 개인의 책임이라면 병에 걸리는 것도 우리의 잘못이라는 논리를 적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170-171p

 

우리 모두는 언제고 죽게 될 운명이라는 것,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 전 우리 중 거의 전부가 질병, 장애 그리고 상당한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건강 제일주의의 마지막 비극은 우리가 전혀 준비하지 못한 상태로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맞이하도록 한다는 점이다. 건강이 도덕적 순결함의 징표라고 믿는다면, 건강에 작은 문제가 생기는 것도 죄의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고, 결국 죽음은 우리 모두를 실패자로 만들고 말 것이다. 장수는 엄청나게 흥미로운 인생의 업적이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운동도 인생을 걸고 수행해야 할 과업이 아니다.-174p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질병이 반드시 피해 간다는 보장은 없다. 건강 제일주의에 심취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죄책감으로 옭아맨다. 마찬가지로 작가는 지방을 맘껏 먹는 편이 오히려 몸과 마음에 좋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편해

작가는 지금 꺼내도 불편한 주제들에 대해 수십년전부터 글을 써왔다. 책상머리에서 원론적인 주장을 하고, 이상적인 대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피, 땀, 눈물을 직접 담아서 전한다. 그녀는 용감한 작가다.

 

그럼에도 그녀의 글을 읽는 내내 어딘가 불편했다. 그렇다. 그녀는 이미 성공한 백인 작가다. 건강보험 혜택을 받고 있고, 남편도 있으며, 아이비리그 대학에 들어간 딸도 있다. 유명 휘트니스센터의 회원권과 신용카드도 갖고 있다. 그녀의 워킹푸어 체험기는 땀냄새가 흥건하지만 그건 그녀의 ‘현실’이 아니라 ‘한 달 간의 실험’이었다. 그녀에게는 도망칠 곳이 있었다. 힘든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지만 그녀는 그들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글에는 절망이 없다. 도저히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는 절망, 하면 할수록 더 나빠진다는 절망. 그녀는 타인의 절망을 관찰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건 타인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녀는 실험을 끝내고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녀처럼 용감하게 불편한 이야기를 써내는 작가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녀 또한 기득권자이며, 불편한 이야기를 관찰하고 전달할 뿐이라는 점에서 약간은 씁쓸하다. 하긴 진짜로 절망에 빠진 이들은 이렇게 글을 쓰고, 책을 펴낼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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