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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YES24

밀레니얼은 지쳤다!

1974년, 정신과 의사인 허버트 프로이덴버거(Herbert Freudenberger)는 과로 때문에 신체적, 정신적 붕괴를 겪는 환자들을 “번아웃(burn-out)”이라고 진단했다. 번아웃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탈진된 상태에서도 계속 나아가라고 자신을 다그치는 것을 말한다. 이전부터 이런 상태에 놓인 이들은 있었기에 번아웃 자체가 새로운 현상은 아니지만 21세기의 번아웃은 다르다.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1990년 중반 사이에 태어난 이들) 전체가 번아웃 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밀레니얼 세대는 늘 일하고, 늘 눈치를 보면서도 늘 욕을 먹고, 늘 불안해 한다. 어째서 밀레니얼은 번아웃에 빠졌을까?

 

밀레니얼에게 주어진 퀘스트: 기대는 높지만 성취감은 낮다

<요즘 애들(Can't Even)>은 미국의 이야기지만 등장하는 사례에서 이름만 바꾸면 한국의 현실과 정확히 겹친다. 밀레니얼의 번아웃이 특정 국가 만의 문제가 아니라 선진국가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동세대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특정 세대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부모 세대는 “좋은 대학만 가면 성공할 수 있어”라고 말했다. 중산층이라는 계급에 진입하기 위해, 그 계급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헬리콥터 부모가 되어 자식들의 인생 진로를 계획하고, 학원을 보냈으며, 과외를 시켰다. 아이들은 대학에 가기도 전에 지쳐버렸다.

대학만 가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대학은 좋은 일자리와 중산층의 지위를 보장해 주지 않았다! 회사는 아웃소싱, 비정규직 등의 갖가지 이름으로 사람을 크리넥스 티슈처럼 뽑아 쓰고 버렸다. 이제 세상은 밀레니얼에게 “좋아하는 일을 찾아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어”라고 말했다. 밀레니얼은 고용 안정성, 최소한의 보험 대신 ‘열정을 쏟을만한 멋진 일’을 욕망할 수 밖에 없었다. 어차피 좋으면서 안정적이고, 충분한 돈을 주는 직업은 이제 남아있지 않으니까. 그나마도 프리랜서, 긱 이코노미 등의 이름으로 점점 복지의 사각지대로 몰리고 있다. 개인 사업자가 된 이들은 성과도 위험도 오롯이 스스로 감당해 내야 한다. 쳇바퀴 돌듯이 뛰는데도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젠 “일을 포기하지 않고도 멋진 삶을 살 수 있다”라고 말한다. 스마트폰에는 워라밸을 즐기는 이들과 알파맘이 넘쳐난다. 세상은 네가 노력만 하면 일과 여가, 커리어와 가정, 모든 걸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정작 대부분의 밀레니얼은 너무 지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있지 않은데 말이다. 스마트폰의 세계는 밀레니얼을 감시하고, 압박한다.

 

밀레니얼의 잘못이 아닌 체제의 실패

작가는 밀레니얼의 번아웃이 개인의 노력 부족이 아닌 체제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2차 대전 이후 세계는 안정됐고, 고착된 체재 속에서 경쟁의 형태는 점차 복잡해졌다. 베이비 부머 세대가 얻은 만큼의 성취는 밀레니얼 세대가 얻기란 쉽지 않다. 동시에 좋은 직장은 점점 더 귀해지고 있다. 기업은 비용 저감과 주주 가치 증대를 위해 아웃소싱을 늘렸다. 이전에는 노동법 안에서 보호받던 이들이 이제는 개인 사업자라는 이름으로 저임금, 저복지 상태에 놓이게 된다. 성평등을 외치지만 여전히 여성은 전업 노동자이면서 전업 주부까지 맡아야 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청년 세대는 필연적으로 번아웃에 내몰리게 되었다. 지쳐버린 밀레니얼 세대는 어른의 지표인 결혼과 출산을 미루거나 포기하게 된다. 어른으로 나아갈 물질적, 정신적 자산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

작가는 밀레니얼의 번아웃이라는 현상을 지목하고, 그 원인을 분석했다. 그러나 체제의 실패라는 원인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연대하고, 목소리를 높이자”고만 그친 것이 아쉽다.

 

그보다 더욱 아쉬운 것은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이다. 원제는 <Can’t even>으로 한국어로 직역하기 쉽진 않지만 <요즘 애들>이 최선이 아님은 분명하다. 밀레니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책은 세대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밀레니얼을 번아웃으로 몰고 간 체제를 비판하는 책이다. 적어도 <요즘 애들>이 아니라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정도의 제목이어야 주제의식을 나타낼 수 있다고 본다. 4글자 명사로 제목을 지어야 히트친다는 낭설이라도 믿은 걸까? 번역본의 제목 때문에 이 책의 가치가 절하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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