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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YES24

 

이라크 전쟁 종군기

종군기자. 역사적 현장에 가까이 가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기자들은 불나방처럼 전쟁터로 모여든다. 로버트 카파, 조지 오웰 등이 전쟁터로 달려가 전율했고, 절망했으며, 인격이 바뀌었고, 세상을 바꾼 보도를 했다. 전쟁을 가까이에서 경험하고 보도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용기와 함께 변해가는 자신을 감내할 용기도 필요하다.

 

조선일보 강인선 기자는 2003년 이라크 전쟁에 종군기자로 참여했다. 그녀의 종군기는 조선일보를 통해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해졌다. 대형 전쟁이 거의 사라진 21세기에 전쟁 현장의 생생한 기록은 생경했다. 강인선 기자는 당시 지면에 실리지 못한 경험을 엮어 <사막의 전쟁터에도 장미꽃은 핀다>로 발표했다. <여기가 달이 아니라면>은 2003년 책의 개정판이다. 2003년 발행된 구작에서 전쟁 현장의 생생함이 느껴졌다면 2021년의 신작에서는 차분함이 느껴진다. 아마도 2003년 당시에는 밝혀지지 않았던, 이라크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대량 살상 무기의 존재에 대해 이제는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은 생화학 무기 같은 살상무기를 언급하며 이라크를 응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전쟁이 끝난 이후, 이라크 어디에도 그런 무기의 흔적이 없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전쟁을 했던 걸까.

 

숲이 아닌 나무의 상처를 보게 하는 embed program

강인선 기자는 미국 국방부가 이라크 전쟁을 취재하려는 종군기자들의 부대 내 동행을 허용한 ‘임베드(embed) 프로그램’에 따라 미군 제5군단 지원부대에 배치돼 공격 지휘소와 함께 움직이며 40일간 이라크 전쟁을 취재했다. 임베드 프로그램을 통해 이라크 전쟁에 참여한 기자는 약 400여명으로 그중 미국이 아닌 외신 기자는 100여 명 정도였다. 외신, 그것도 여성 기자의 존재는 미군 내에서도 신기했고, 그 덕에 강인선 기자는 한편 다행으로, 한편 안타깝게도 최전선이 아닌 보급부대와 동행했다. 실제 미군의 진행 경로를 따라가면서 현장을 묘사하고, 미군 지휘관의 계획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는 장점이 있지만 종군기자라면 동경하는 피 튀기는 현장을 담아내지는 못했다.

 

임베드 프로그램 자체가 가진 한계도 있었다. 기자들은 미군과 함께 생활하며, 미군과 동일한 경로로 움직인다. 그렇게 되면 내가 처한 현장을 묘사할 수는 있지만 전쟁 자체가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한 큰 그림은 볼 수 없다. 종군기자는 전쟁을 중립적으로 바라보고 전달해야 하지만 임베드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면 미군 병사에게 감정이입을 하기 쉬워진다. 일개 병사는 개인적으로 만나면 따뜻하고, 모두가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있다. 이런 전쟁을 일으킨 이라크는 위험하고,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자살 폭탄 테러일 수 있으니 함부로 다가가서는 안된다. 그것이 미국이 임베드 프로그램을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것이다. 종군기자들이 전쟁에 뛰어들어 미국에 비판적인 기사를 쓰게 하는 것보다는 전쟁 내내 끌고 다니면서 미군과 일체감을 갖게 하는 것. 그 덕에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종군 기자의 범위는 넓어졌으나 종군기는 전체 숲을 보지 못하는 좁은 글이 되었다.

 

전쟁을 겪은 자만이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겪은 자가 전하는 이야기는 묵직한 울림을 준다. 생화학 무기가 터지면 저항할 수도 없이 죽는다는 공포, 지도에서도 가늠할 수 없는 사막에 떨어져 있다는 두려움, 그리고 오랜 기다림, 뜨거운 태양과 뼈까지 스미는 한밤중의 추위, 잊을만하면 모든 것을 삼키는 모래폭풍까지… 전쟁에 눌리고, 자연에 가로막혔는데, 기계는 고장나고, 사람은 길을 잃는다.

 

사막을 건너는 것처럼 막막한 일도 없다. 그럼에도 사막을 건너는 사람들은 세 부류라고 한다. 상인과 군인 그리고 구도승. 돈과 권력, 영혼을 추구하는 자들이 사막을 횡단한다는 것이다. 나는 사막 위에서 펼쳐지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전쟁 준비 과정을 보며 무력감을 느꼈다. 그 장면은 사진으로도 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웠다. 내 카메라의 줌을 최대한 확대해도 그 거대한 사막을 담을 수 없었다. 내 어휘도 힘이 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p.30

 

내일 아침에도 살아서 일어날 수 있을까? 나는 텐트 벽을 향해 방패처럼 방탄조끼를 세웠다. 그러곤 침낭 안으로 기어들어가 쿠웨이트를 떠나기 전 공보관 맥스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최악에 대비하라, 그러나 최선을 희망하라.”
현실은 그 중간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 p.118

 

사막만큼 막막한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두려움에 떨고, 기다림에 지치던 일상은 어느새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안 떠도 할 수 없고”라는 체념과 득도의 경지에 이른다. 그러나 하나둘 이탈하는 다른 종군기자들을 보면서 다시금 괴로워한다. 아수라장에서 나갈 수 있는데, 과연 지금 나가도 될까. 겁쟁이가 되진 않을까, 지금 나가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하며 죽진 않을까. 다행히 이라크 전쟁의 전투는 40여 일 만에 끝났고, 기자는 무사히 돌아온다. 하지만 기자는 알게 된다. 전쟁을 겪은 자는 결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위기 상황과 마주하면 자기 자신 속에 숨어 있던 또 다른 자신이 튀어나와. 평생 단 한 번도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어떤 면이 나오게 돼 있어. 늘 약해 보였던 사람이 난데없이 괴력을 발휘해 위기를 넘기기도 하고, 강한 줄 알았던 사람이 힘없이 무너지기도 하지. 엄청난 심리적 압박을 받을 때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이 무엇으로 구성돼 있는지 깨닫게 되는 거야. 전쟁은 국가 간의 싸움만이 아니야. 전쟁터에 있는 인간들은 모두 자기 자신과도 싸우게 돼 있어.”-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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