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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YES24

 

경제학자들은 숫자만 본다

경제학자들은 숫자를 보면서 경제현상을 분석하고, 예측한다. 그러나 숫자는 이미 나타난 일을 알려주는 결과물일 뿐이다. 사람들이 이미 움직이고 난 흔적이 숫자인데, 그 숫자를 보고 나서 사람들의 움직임을 예상하기 때문에 경제학자들의 예상은 거의 빗나간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무엇을 따라 움직이는가? 사람을 움직이는 건 숫자가 아니고 내러티브(narrative)다. 케인즈가 주장한 야성적 충동처럼 사람들은 비논리적이고, 감정적인 ‘이야기’를 따라 움직인다. 따라서 경제적 사건은 논리적 배열이 아니다.

 

 

내러티브=사실+감정+인간적 흥미+사람들의 인상

행동경제학자인 저자(로버트 쉴러)는 숫자가 아닌 인간의 행동을 연구해 경제현상을 설명한다. 그는 인간이 숫자가 아닌 내러티브를 따라 움직인다고 주장한다. 그가 정의하는 내러티브는 1) 말로 전해지며 이야기 형식을 띤 아이디어의 전염, 2) 전염성 강한 이야기를 새로 창조하거나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를 널리 확산시키고자 하는 노력이다.

 

내러티브는 스토리와 다르다. 내러티브가 되려면 임팩트가 커야 한다. 이를 섬광기억이란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마치 섬광이 비치듯 강렬한 인상을 남겨야 한다. 9.11 테러가 대표적인 예로, 사람들은 그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테러 당시에 본인이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런 강력한 기억이 감정적 동조를 일으키고, 신념이 될 때 내러티브라고 할 수 있다.

 

내러티브는 전염병과 비슷하다. 전염병이 유행하려면 전염률이 완치율보다 높아야 한다. 내러티브도 마찬가지로 전염률이 망각률 보다 높을 때 넓게 퍼진다. 그렇다고 해서 특정 내러티브가 반드시 오래 지속되는 건 아니다. 어떤 내러티브는 짧고 굵게 유행하기도 하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 다시 반복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유행이 된 내러티브를 사람들이 자주 언급하는 것도 아니다. 굳이 입에 올리지 않더라도 이미 ‘신념’이 됐으면 내러티브라 할 수 있다.

 

경제 내러티브의 유행에도 같은 모형을 적용할 수 있다. 내러티브의 전염은 개인에서 개인으로, 만남이나 전화 또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뤄진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보면서 언론 매체나 토크쇼를 통해 다른 매체로 전염되기도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유행의 궁극적 원인이 불분명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대부분의 경제 내러티브에서는 전염병과 달리 죽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지만, 확산의 기본 과정은 유사하다.- P.55, 3장 전염, 군집, 융합

 

같은 이야기라도 유명인이 말해야 내러티브가 되기 쉽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자체”라는 말은 이전에 비슷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이 한 적이 있지만 우리는 루스벨트가 한 이야기로만 기억한다. 트럼프가 “금본위제가 옳다”, “동맹은 미국의 돈을 낭비한다”라고 말하면 내러티브가 되기 쉽다.

 

 

우리를 지배하는 내러티브

어떤 이야기들이 내러티브가 되어 우리를 움직이게 했을까? 요즘 가장 뜨거운 내러티브는 비트코인이다. 사람들은 가상화폐가 어떤 기술을 바탕으로 어떻게 가치가 정해지는지를 이해하고 투자하는 게 아니다. 그냥 그게 돈이 된다고 하니까 우르르 달려가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1929년 대공황 이전의 주식장에서도 나타났다. J.F. 케네디의 아버지는 당시 구두닦이 소년까지도 주식투자를 말하는 걸 듣고 주식시장 과열을 깨달았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부동산 불패 신화, 금본위제, 골드러시 등이 일확천금을 주장하며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에는 분노하기도 한다. 러다이트 운동은 기계가 사람의 일자리를 뺏는다고 주장했는데, 이제는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뺏는다. 래퍼 곡선이라는 개념이 크게 유행한 것도 세금을 줄이면 효용이 커진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래퍼 곡선을 근거로 세금이 너무 높다고 화를 냈다.

 

어떤 면에서 머신러닝 내러티브는 컴퓨터가 인간이 만든 프로그램을 구동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불편하게 만든다. 역사학자 유발 노아 하라리는 이 내러티브를 ‘새로운 무용 계급’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우리의 두려움과 우리 자신에 대한 ‘불관용의 두려움’이라고 묘사한다. 만일 그러한 두려움이 상당한 규모로 확산된다면, 실존적 공포는 경제 신뢰 그리고 나아가 경제 자체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335p

 

내러티브는 우리를 감정적으로 움직이게 만든다. 우리는 유명인의 말을 근거로, 나의 불안을 이유로 내러티브를 따라 움직인다. 비트코인이 주류 내러티브가 된 것은 정부 시스템에 대한 불신, 빈부격차에 대한 불만, 끊어진 사다리에 대한 절망 때문이다. 일확천금을 바라는 사람들이 기존 시스템을 뛰어넘을 수단으로 비트코인을 선택한 것이다. 근거는 비논리적이지만 개인의 상황에서는 이보다 더 합리적일 수 없다.

 

경제학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학문이다. 인간을 합리적이라고 가정하며, 상황을 논리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감정을 배제하고, 매우 제한된 가정을 세운다. 그러나 현실 세계는 무균 상태인 실험실이 아니다. 인간은 감정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행동을 일부러 하기도 한다. 현실은 너무 복잡해서 경제학 모델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훨씬 많다. 행동경제학은 그런 경제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의 행동을 기반으로 설명한다. 경제학에서 멍청한 행동이라고 주장하는 뱅크런은 무너진 제도를 신뢰할 수 없는 개인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행동이다. 하긴 기존 경제학은 제도가 무너질 수 있다는 가정조차 하지 않는다. 행동경제학이 경제학 주류가 되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복잡한 세상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들을 해석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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