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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카네기 홀에 선 여인

“노래를 부를 수 없다면 이미 죽은거야”

 

커다란 무대 위, 단 하나의 마이크.

눈부신 조명이 그녀를 비췄고, 수만 개의 눈동자가 그녀를 쫓았다. 그녀는 마이크 앞에서 가만히 숨을 골랐다.

 

노래가 끝나자 관객들은 뜨겁게 환호했다. 관객의 호응에 활짝 웃었지만 무대 뒤로 나오자 극심한 고통에 무릎이 꺾였다. 누군가 그녀의 팔에 주사를 놓았다.

육체의 고통이 희미해지자 아픈 기억이 몰려왔다. 차가운 부모의 표정, 몸을 파는 여인들, 거리에서 만난 남자들, 그리고 사랑했던 그 사람.

 

아니요,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라 비 앙 로즈>

Non, je ne regrette rien
Car ma vie Car mes joies
Aujourd'hui Ça commence avec toi

 

 

에디트 피아프(Édith Piaf, 1915-1963)

Édith Giovanna Gassion으로 태어나 프랑스 국민 가수가 된 여인. “La Vie en rose(장미빛 인생, 1946)”, “Hymne à l'amour(사랑의 찬가, 1949)”, “Non, je ne regrette rien(아니요,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1960)”을 통해 장미빛 사랑과 핏빛 슬픔을 노래했다.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미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으며, 뉴욕의 카네기홀과 파리의 올랭피아 극장에서 공연했다. 1998년에 ‘La Vie en rose’로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영화 <라 비 앙 로즈(La vie en rose)>는 에디트 피아프의 화려한 성공과 비참한 인생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에디트는 곡예사인 아버지와 길거리 가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전쟁통에 그녀를 버렸고, 아버지도 포주인 할머니에게 에디트를 맡기고 떠났다. 어리고 약한 에디트는 각막염에 걸려 실명할 뻔 했고, 서커스단을 따라 다니며 눈칫밥을 먹었다. 불친절한 세상에서 먹고 살기 위해 일찍부터 길에서 노래를 불렀다. 20살이 되었을 때 기회가 찾아왔다. 캬바레 제니스의 주인 루이 르플레가 에디트를 가수로 발탁했다. 에디트는 라 몸 피아프(La Môme Piaf, 어린 참새)’가 되어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르플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에디트는 모든 걸 잃고 다시 거리로 내몰렸다. 몰락한 그녀에게 시인이자 작가인 레이몽 아소가 손을 내밀었다. 그는 에디트의 발성을 고쳐주고, 무대 매너를 가르쳐 주었으며, 그녀의 이미지를 바꿔주었다. 작기만 했던 참새(La Môme Piaf)는 에디트 피아프가 되어 부활했다.

 

최고의 가수로 모든 이에게 사랑받았으나 그녀의 연애는 험난했다. 어린 나이에 낳았던 아이는 뇌수막염으로 일찍 죽었고, 노래로 번 돈은 거리의 불량배들에게 뺏겼다. 부두 노동자였던 이브 몽탕(Yves Montand)과 사랑에 빠져 그를 후원했지만 이브 몽탕은 유명세를 얻자마자 에디트 곁을 떠났다. 복싱선수 마르셀 세르당(Marcel Cerdan)과 뜨거운 사랑을 했지만 그는 유부남이었다. 세상이 그들의 사랑을 비난하기도 전에 마르셀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만남과 이별을 거듭하며 심리적으로 약해졌고, 술과 약물에 의존하면서 육체적으로 망가졌다. 평생 노래를 불렀고, 많은 인기를 얻었지만 공연 취소 위약금을 내느라 죽은 후에는 빚만 남았다.

 

사람들은 검은 드레스를 입고 무대 한가운데에 선 142cm의 작은 여인을 참새(Piaf, 피아프)’라고 불렀다. 그 작은 참새는 자신의 인생을 노래했다. 이브 몽탕을 사랑했을 땐 세상을 장미빛(La Vie en rose)이라 노래했고, 마르셀 세르당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사랑의 찬가(Hymne à l'amour)를 부르며 그와의 사랑을 추억했다. 죽음을 앞두고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Non, je ne regrette rien)고 외쳤다.

 

내 모든 걸 가져요-<빌리 홀리데이>

You took the part that once was my heart
So why not take all of me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1915-1959)

Eleanora Fagan으로 태어났으나 ‘Lady Day’로 불린 재즈 디바. “Strange Fruit(1939)”, “All of Me(1941)”, “I'm a Fool to Want You(1958)”을 통해 뜨거운 사랑과 차가운 차별을 노래했다. 1940년대 후반 재즈 가수로는 드물게 솔로 콘서트를 가졌고, 카네기 홀에서도 공연했다. 독특한 보컬 스타일로 재즈 역사에 한 획을 그었고, “Strange Fruit”을 불러 타임지에 사진이 실리는 최초의 흑인이 되었다. 4번의 그래미 상을 받았고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영화 <빌리 홀리데이(The United States vs. Billie Holiday)>Johann Eduard Hari가 쓴<Chasing the Scream: The First and Last Days of the War on Drugs>라는 책에서 모티브를 얻어 “Strange Fruit”를 불러 흑인 저항운동의 상징이 된 빌리가 FBI의 마약 수사를 받으면서 몰락하는 부분에 집중했다. 빌리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나 말할 수 없는 그 사실을 무대 위에서 노래했다. 미국 주류 사회는 흑인을 들쑤시는 그녀의 노래가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런 노래를 부른다는 이유만으로는 그녀를 법적으로 옭아맬 수 없었다. 하지만 마약 중독자라면 잡아서 가둬둘 수 있고, 사회에서 추방시킬 수 있으며, 그녀의 모든 것을 평가절하시킬 수 있었다. FBI의 마약 전담 요원 Harry J. Anslinger는 빌리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그녀가 함정에 빠지기를 기다린다.

 

빌리는 육체와 정신의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려 마약을 찾았다. 그녀는 어린 떠돌이 악사와 그보다 더 어린 창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란 사람은 일찌감치 모녀를 버렸고, 어머니도 그녀를 사창가로 밀어 넣었다. 10살 때부터 성폭력을 당했고, 먹고 살기 위해 몸을 팔았다. 많은 이들과 연애를 했고, 결혼도 3번이나 했으나 한번도 제대로 사랑받지 못했다. 남편이란 작자들은 그녀를 때렸고, 그녀가 번 돈을 뜯어냈으며, 그녀를 마약으로 밀어넣었다. 카네기 홀을 매진시킬 정도로 성공한 가수였지만 흑인이었기에 차별받았다. 자신이 공연했던 호텔에서 잠을 잘 수도 없었고, 무대 위에서 같이 연주한 백인 연주자들도 그녀와 같은 테이블에 앉길 거부했다. 가족에게, 사회에게 상처받은 빌리는 점점 더 마약에 의존했다. 심각한 약물 중독으로 치료소와 감옥을 전전했고, 결국 치료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 세상을 떠났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그제서야 그녀가 고통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했다.

 

무대 위에서 그녀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우아한 숙녀였다. 사람들은 치자꽃을 머리에 꽂고 무대 위에 선 그녀를 ‘Lady Day’라 칭송했다. 그녀는 사랑에 빠진 자신이 바보라고(I'm a Fool to Want You), 내 모든 걸 가지라고(All of Me) 노래했다. 한편으론 집요한 방해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미국 남부에서 열리는 이상한 열매(Strange Fruit)를 노래했다. 흑인을 무차별하게 살해하고 그 시신을 자랑스레 나무에 걸어놓는 세상. 그렇게 열린 이상한 열매는 평생 차별받고 버림받은 빌리 자신을 상징했다.

 

병상에서 스러진 여인

1915년에 작은 소녀가 태어났다. 부모는 그녀를 버렸고, 세상은 그녀를 거리로 내몰았다. 노래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하늘을 날아오를 듯이 기뻤다. 사랑에 빠졌을 때, 그 사랑을 잃었을 때, 세상의 시선에 아플 때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를 수 없을 때면 외로움과 고통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여리고, 지친 영혼은 술과 마약에 의존했고, 그렇게 자신의 몸을 혹사시켰다.

 

에디트 피아프와 빌리 홀리데이는 40대의 나이에 간암과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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