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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지브리 스튜디오(https://www.ghibli.jp/)

 

나를 구해준 건 혹시 왕자님?

그녀는 도망쳤다. 미로 같이 어두운 골목에서 온 힘을 다해 뛰었지만 곧 잡힐 것 같았다. 그 순간 몸이 떠올랐다. 땅을 달리던 발은 공중에서 허우적거렸다. 그와 함께 하늘을 날고 있었다.

 

90살의 소녀 이야기-<하울의 움직이는 성>

난 지금껏 계속 도망치기만 했어. 이제 겨우 지켜야 할 게 생겼어. 바로 너야.
僕はもう充分逃げた。ようやく守らなければならないものができたんだ。君だ

 

 

<하울의 움직이는 성(ハウルの動く城)>은 지브리 스튜디오가 2004년 공개한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영국 작가 다이애나 윈 존스(Diana Wynne Jones)의 소설인 <Howl's Moving Castle>을 각색해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20살 소피는 우연히 길에서 하울을 만나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이 일을 질투한 황야의 마녀의 저주로 하루아침에 90살 할머니로 변해 버린다. 소피는 마법을 풀기 위해 황야로 떠나는데, 어쩌다 도착한 곳이 하필 하울이 살고 있는 성이다. 소문에는 하울이 ‘미인의 심장을 먹어치우는 마법사’라고 했다. 소피는 자신이 미인도 아니고, 게다가 할머니가 되어 버렸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 하울의 성에서 가정부로 일한다.

 

터널 너머에는 이상한 마을이 있었다-<센과 치히로>

겁내지 마. 나는 그대의 편이야.
怖がるな。私はそなたの味方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と千尋の神隠し)>은 지브리 스튜디오가 2001년 공개한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원작과 각본을 쓰고, 감독까지 맡았다. 2002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에 해당하는 금곰상을 받았는데, 세계 3대 영화제(베를린, 베네치아, 칸)에서 애니메이션이 최고상을 받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2003년 아카데미에서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에서 수상했고, 2016년에 BBC가 뽑은 ‘21세기 위대한 영화 100’에서 4위로 선정됐다.

 

10살 치히로는 아빠, 엄마와 함께 차를 타고 이사를 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 이상한 터널 앞에 도착했다. 낯선 곳을 겁내는 치히로와 달리 그녀의 부모는 터널 너머로 거리낌 없이 들어선다. 치히로의 부모는 온천장 앞의 주인없는 가게에서 함부로 음식을 먹다가 돼지로 변해버린다. 이를 보고 치히로가 겁에 질려 있을 때 의문의 소년 하쿠가 나타나 치히로를 도와준다. 온천장의 주인인 유바바를 찾아간 치히로는 신들의 세계에서 정체를 숨기고 ‘센’이란 이름의 온천장 종업원으로 일하게 된다. 온천장의 직원들은 하쿠가 유바바의 부하라고 했지만 센은 자신을 도와준 하쿠를 의심하지 않았다.

 

나를 찾는 모험

하울과 하쿠는 위기 때마다 소피와 치히로(센)를 구해준다. 소피가 짓궂은 군인들에게 둘러 쌓였을 때나 위대한 마법사 설리반에게 정체가 탄로났을 때 하울은 멋지게 나타나 소피를 데리고 하늘로 날아간다. 하쿠는 신의 세계에서 인간인 치히로가 쫓길 때 몸을 숨길 수 있게 도와주고, 그 세계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을, 나아가 하울과 하쿠를 구한 것은 소피와 치히로였다.

 

하울을 만나기 전 소피는 자신을 억누른 채 묵묵히 일만 하는 사람이었다. 예쁜 새엄마와 동생이 부러웠고, 자신도 예쁘게 꾸미고 밖으로 놀러 나가고 싶었지만 아버지께 물려받은 가게를 버려둘 수 없어 하루종일 골방에서 모자만 만들었다. 그렇게 20살 소피는 자신의 마음을 숨겼다. 황야의 마녀가 소피에게 건 마법은 단순히 외모를 바꾸는 게 아닌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늙은 마음을 겉모습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소피는 하울을 사랑하게 되면서 대마법사 설리반과 담판을 지으러 가기도 하고, 하울의 심장을 찾아주려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내던지기도 한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진 소피는 황야의 마녀가 건 마법에서 벗어난다.

 

치히로는 친구들과 떨어져 낯선 동네로 이사가는 것이 싫었다. 그런 치히로가 낯선 세계에서 부모님까지 잃었다. 하쿠는 겁에 질린 치히로가 이름을,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잃지 않도록 일깨워 준다. 덕분에 이상한 일들이 계속 벌어짐에도 치히로는 자신의 원칙을 지킨다. 부모님과 달리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대지 않았고, 온천장의 직원으로 일하면서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모두가 꺼리는 손님에게도 똑같이 대했고, 돈을 더 준다고 해도 함부로 쫓아가지 않았다. 센은 다친 하쿠를 위해 귀한 경단을 내어주고, 하쿠 대신 제니바의 도장을 돌려주러 먼 길을 떠났으며, 하쿠의 진짜 이름을 기억해 낸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리는 세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의 주인공은 거의 대부분 여성이지만 왕자님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신데렐라가 아니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 <모노노케 히메> 등에서는 세상의 운명을 짊어진 존재로, <마녀 배달부 키키>와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에서는 스스로 성장하는 소녀로 등장한다.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도둑단의 두목이거나(라퓨타), 비행기를 만드는 기술자(붉은 돼지)처럼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자기 삶을 주도하는 인물로 나온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리는 여성은 순수하면서도 강하고, 가족을 지키려고 애쓰는 존재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1941년에 도쿄에서 태어나 군수물자와 비행기를 만드는 공장 근처에서 자랐다. 전쟁기간 동안 어머니를 비롯한 여자들은 가족과 사회를 부양했다. 전쟁에 다녀온 남자들이 술에 취해 무용담을 떠벌리기만 했다. 이런 광경을 보면서 자란 미야자키 하야오는 전쟁과 그 전쟁을 자랑스러워 하는 이들을 혐오했고, 모든 것이 파괴된 곳에서 가족과 사회를 먹여 살리기 위해 고생한 이들을 존경했다. 

 

그래서 그는 자연에 둘러쌓인 곳에 지브리의 작업실을 만들었고, 스튜디오 내에 보육원을 설치했으며, 제작 스태프를 정규직으로 상시 고용해 월급을 지급했다. 너무나도 당연한 듯 여겨지는 이런 일들이 당시, 애니메이션 업계에서는 혁명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이전까지 영화나 애니메이션 같은 작품을 만들 때는 그 때마다 필요한 스태프를 모았다가 작품이 끝나면 팀을 해체하는 식으로 작업을 했다. 정규직 스태프에게 항시 월급을 주려면 공장처럼 일정하게 작품을 만들어 내면서 그 작품들이 손익분기점 이상의 흥행을 계속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흥행을 담보하지 못하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는 꿈과 같은 일이다. 지브리는 그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1-2년 간격으로 작품을 공개했고, 거의 흥행시켰다. 이는 고집 센 천재 미야자키 하야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동시에 지브리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없다면 지속불가능한 시스템이기도 했다. 

 

그렇게 지브리와 미야자키 하야오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덕분에 우리는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세상을 바꿔나가는 꿈을 꿀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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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스튜디오 지브리 홈페이지(https://www.ghibli.jp/)
지브리의 천재들(2021), 지브리의 문학(2018), 지브리의 철학(2018), 스튜디오 지브리의 현장 스토리(2009, 이상 스즈키 토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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