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문화가 된다

728x90
반응형

 

열심히 일한 자의 식사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일의 특성상 출장을 많이 다닌다. 일이 끝나면 급격한 허기가 몰려온다. 그렇다고 편의점에서 대충 때우거나 SNS 유명 맛집을 찾아다니지는 않는다. 현지인들만 알음알음 찾아가는 맛집에서 동네 주민들 사이에 섞여 묵묵히 혼자 밥을 먹는다.

 

예전에 비해 혼밥이 흔해졌다. 과거에는 혼자 식당에 가면 주변의 시선이 무서워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혼자 오는 손님을 받지 않는 식당(요즘에도 그렇지만)도 많았는데, 최근에는 혼밥 전용 식당까지 생겼다. 혼영, 혼술까지 혼자서 뭐든지 할 수 있는 세상이 됐지만 혼밥 레벨 테스트도 있을만큼 아직은 혼밥이 어렵다.

 

그나마 중년의 남성, 그것도 정장을 차려입은 비즈니스맨은 다른 사람들보다 혼밥이 쉬울 것이다. 일하다보니 끼니때를 놓쳐 혼자 왔다거나 출장을 왔다거나 하는 티를 낼 수 있으니까. <고독한 미식가>와 <중국집>에서는 열심히 일한 중년 남성의 혼밥을 그려낸다. 열심히 일한 후 급격하게 몰려오는 허기를 반찬 삼아 소박한 맛을 전달한다.

 

 

혼밥의 왕도, <고독한 미식가>

 

이노가시라 고로는 수입 잡화를 취급하며, 인테리어 컨설팅도 해준다. 원래 유명 상사의 직원이었으나 자유로운 것이 좋아 자신의 사업체를 꾸린다. 결혼도 하지 않고, 매장도 없다. 고객이 있는 곳은 직접 찾아가고, 수시로 해외 출장을 간다. 출장지에서, 가장 먹고 싶은 음식, 그 날 느낌이 오는 음식을 먹는다. 사전 조사는 하지 않고, 아무리 맛집이라고 해도 줄이 길면 가지 않는다.

 

드라마로 유명하지만 원작은 만화이며, 꽤 오래전에 발간된 책이기 때문에 드라마와 달리 책에서는 고지식한 이노가시라 고로를 만날 수 있다. 혼밥의 특성 상 주인공의 대화는 거의 없고, 맛있다는 표현도 혼잣말로 채워진다. 주인공의 대화는 없지만 부득이하게 다른 손님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고, 그걸 묘사하는 과정에서 지금으로서는 꽤 꼰대 같은 모습을 보인다. 가상의 인물이기 때문에 그런 대화나 주변 인물을 평가하는 것도 꽤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만화든 드라마든 음식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하기 때문에 공복에 보게 된다면 상당히 괴로운 작품이다. 허름해보이고, 평이한 메뉴인 것 같지만 그곳에서 숨은 고수들을 만나고, 한 끼의 즐거움을 얻는다. 워낙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기 때문에 다양한 메뉴가 등장하고, 한 번에 여러 메뉴를 시켜서 먹기 때문에 메뉴를 비교하는 재미도 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혼밥에 대해 너그러운 나라라서 식사 자체는 크게 어려움이 없지만 술을 못 마신다는 설정이기 때문에 그에 관한 에피소드들이 있다.

 

 

피아노 조율사의 중식 탐방기, <중국집>

 

조영권 씨는 주말에는 인천의 백화점에서 피아노를 팔고, 평일에는 주로 피아노 조율을 한다. 고객에게 연락을 받으면 전국 어디든 출장을 가는 편이다. 피아노라는 건 꾸준히 관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한번 맺어진 인연이 오래가고, 그렇게 맺어진 인연이 또 다른 고객을 소개하기 때문이다. 조율이 끝나고 나면 그 지역의 유명 중식당을 찾아가는데, 식당 위치, 메뉴 등은 미리 검색해서 간다. 오히려 그 메뉴를 먹기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출장을 간다는 것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

 

혼자 먹는 밥이기 때문에 요리를 많이 시키지 않는다. 주로 간짜장 또는 볶음밥을 시키고, 가끔 군만두를 추가한다. 운전하지 않아도 되는 날에는 반주를 곁들인다. 메뉴가 다양하지 않아서 300여 쪽에 달하는 책이 좀 지루할 수 있다. 아무리 잘 묘사했다고는 하나 거의 비슷한 메뉴에, 유별난 차이를 느끼기 어렵고, 사진도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26년 내공의 피아노 조율사는 새로운 세계로 인도한다. 섬세한 피아노를 다루는 일, 세월이 쌓인 피아노를 마주하며 얻는 깨달음 등을 전한다. 실제로는 꽤 황당한 고객도 많이 만나겠지만 <고독한 미식가>와 달리 논픽션이라 인물을 묘사하는 데 조심스럽고, 표현이 훨씬 담백하다.

 

사실, 음식이란 게 반쯤은 추억이다. 사람의 혀는 별거 없다.-188p

 

한국 내에서 짜장면을 취급하는 중식당은 어느 동네나 꼭 있고, 게다가 중년 남성 혼자서 혼밥을 하는 게 눈치 보이는 식당도 아니다. 다만 음식 사진을 찍는 걸 이상하게 쳐다보거나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하는 에피소드들이 있다.

공유하기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