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문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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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YES24

 

불편한 진실

우리는 “모든 인간이 평등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동시에 “돈이 세상의 질서인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목숨은 소중하다고 알면서도 사람에게 각기 다른 목숨 값을 정한다. 그렇다. 안타깝게도 사람마다 목숨 값이 다르다. 어떤 이들은 어떻게 사람마다 목숨 값이 달라질 수 있냐며, 자신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우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다음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같은 사고를 당했을 때 젊은 의사와 노숙자가 받는 보상금이 같을까? 노숙자가 아니라 아동성착취범 같은 범죄자라면? 두 사람에 대한 보상금의 크기가 같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내 자식을 살리는데 지불할 금액과 굶어 죽어가는 아프리카 소녀를 살리기 위해 지불할 금액은 똑같을까? 장기이식을 먼저 받아야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90세 할아버지일까 아니면 5살 아이일까? 교차로에서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과실치사로 사람을 1명 죽인 운전자가 연쇄살인마와 같은 벌을 받아야 할까? 낙태는 나쁘다고 비난하면서 낳은 아이를 입양해서 키워주는 사람은 왜 드문 걸까? 하다못해 우리가 받는 임금도 목숨 값의 차이를 반영한다.

 

이 책은 사람마다 목숨 값이 다르다는 현실에서 출발하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본다. 1) 인간 생명에는 일상적으로 가격이 매겨진다. 2) 이 가격표는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3) 이러한 가격표는 투명하지도 공정하지도 않다. 4) 가격을 낮게 책정받은 사람은 더 큰 위험에 노출된다.

 

 

목숨 값의 차이

9.11 보상금

2001년 9월 11일 뉴욕, 전대미문의 대형 테러로 약 3,000여 명의 사람이 죽었다. 미국 정부는 9.11 희생자에게 깊은 애도를 표하며,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동시에 희생자 보상 기금을 만들어 보상금을 지급했다. 보상금은 최소 25만 달러에서 최대 700만 달러까지 약 30배나 차이가 났다. 모든 인간은 평등한데, 왜 목숨 값은 이렇게 차이 났을까?

 

9.11 희생자 보상 기금의 파인버그가 고안한 산출 방식은 비경제적 가치와 피부양자 가치, 경제적 가치를 합산한 것이었다. 비경제적 가치는 모든 희생자에게 25만 달러라는 동일한 금액이 책정되었다. 피부양자 가치는 모든 피부양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 희생자에게 배우자가 있으면 10만 달러가 추가되었고, 피부양자가 한 명 늘어날 때마다 10만 달러씩 추가되었다. 경제적 가치는 희생자의 소득에 기반하여 책정되었기에 결과 값은 천차만별이었다. 이 가치는 희생자의 평생 기대소득, 각종 수당 및 기타 혜택 등을 계산한 뒤 희생자의 실효세율에 맞추어 조정해 얻은 값이었다. 이 계산법에는 희생자의 나이, 정년까지 남은 햇수, 기대 소득 증가분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었다. 보상금 최저액과 최고액 차이는 매우 컸다. 어떤 희생자들에게는 다른 희생자들 생명의 거의 30배에 달하는 가치가 매겨졌다.- p.25

 

9.11 테러 당시 WTC에서 근무하던 사람은 1년에 수조 원을 굴리던 사람부터 일용직까지 다양했다. 희생자 보상 기금은 죽은 이들의 경제적 가치를 고려했고, 남겨진 사람들의 경제적 손해를 반영해 보상금을 책정했다. 이는 합리적이었지만 공정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9.11 테러가 미국 내에서 일어난 최초의 테러도 아니었고, 이와 같은 테러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으며, 테러가 발생하는 데 있어 항공사 등의 부주의를 고려하지 않은 채 국가가 국고로 보상금을 지급해 나쁜 선례를 만들었다. 어떤 테러를 당해야 국가가 보상금을 주는가? 왜 그때는 그렇게 돈을 많이 줬는가? 왜 국가가 목숨 값을 다르게 평가했는가?

 

 

법 앞의 평등?

모든 인간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고 배우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민사 사건의 경우 사건이 언론에 많이 노출될수록 배상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 형사 사건에서는 인종, 성별, 연령에 따라 양형이 달라졌다. 배심원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하기 쉬운 계층일수록 처벌 수위가 낮았다.

 

 

비용편익분석

상당수의 목숨 값이 비용편익분석을 통해 결정된다. 즉, 그걸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수익을 따져보는 것이다. 임금과 의료보험이 그러하다. 바바라 에런라이크는 <지지않기 위해 쓴다>에서 저임금 노동자가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함을 지적했다. 저임금 노동자는 거의 일급, 주급으로 생활하는데, 의료보험이 없기 때문에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한다. 이는 결국 결근으로 이어지고, 잦은 결근 때문에 해고된다. 낮은 목숨 값을 가진 이들이 더 큰 위험에 노출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지지 않기 위해 쓴다(Had I Known: Collected Essays)-부조리한 사회에 불편한 이야기를 던진 기록

 

지지 않기 위해 쓴다(Had I Known: Collected Essays)-부조리한 사회에 불편한 이야기를 던진 기록

불편한 이야기를 쓴다 바바라 에런라이크(Barbara Ehrenreich)는 ‘사회에서 불편하다고 여겨지는 주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글을 쓴 저널리스트이다. 그녀는 책상머리에서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는

moku-culture.tistory.com

 

기업은 비용 때문에 환경영향평가를 무시하거나 중요한 부품을 빼거나 사고 위험을 낮춰서 보고하기도 한다. 만약 사고가 발생할 때 지불해야 하는 보상금이나 리콜 금액이 보다 높은 수준의 안전장치를 하는 것보다 적게 든다면 기업은 안전을 경시한다. 그래서 기업이 규제를 낮추기 위해 정부에게 열심히 로비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떳떳한가?

많은 이가 목숨 값에 차등을 두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겠지만 우리 스스로는 과연 그런 편향을 가지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사람은 내집단으로 편향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인지오류가 발생하기도 한다. 따라서 어떤 집단, 인물에 더 많이 공감하게 되면 그의 목숨 값을 더 높이 평가한다. 연예인의 자살은 시리아 내전에서 희생된 수천 명의 아이보다 더 주목받는다. 전쟁이 일어나면 자국민의 희생은 안타깝지만 적국은 더 많이 죽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가 선택한 목숨값

우리는 스스로 목숨 값을 정하기도 한다. 생명 보험이 그렇다. 생명 보험은 자신이 죽을 확률, 자신의 소득, 남게 될 가족의 생계비를 고려하여 스스로 가격을 책정한다.

 

지금까지 보았던 다른 종류의 생명 가격표와는 달리 생명보험에서는 공정성이 가격을 결정하는 데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생명보험의 생명 가격표는 소비자가 결정한다. 둘째, 생명보험은 경쟁 시장이 있다. 셋째, 생명보험의 값은 사망 위험을 기준으로 한다. 마지막으로 생명보험을 판매하는 기업은 공정성에 대한 우려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자신들의 상품이 공정하게 판매되도록 해야 할 의무도 없다.- p.153

 

자신의 목숨 값뿐 아니라 가족의 목숨 값을 정하기도 한다. 임신임을 알게 됐을 때, 태아가 장애를 가졌을 때 우리는 여러 비용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녀 양육에 드는 비용에 대해 정식으로 재정 분석을 하는 부부들은 많지 않지만, 아이를 갖기로 결심하는 부부들은 의식적으로 출산과 양육에 따르는 기대 비용을 반드시 고려한다. 기업이 수행하는 비용편익분석처럼 아이를 가질지 말지에 대한 결정을 단순히 금전적 계산으로 보는 것은 편협한 시각일 뿐 아니라 부모가 되기로 결심하는 과정의 현실과 동떨어진 일이다. 하지만 아이를 갖는 일의 정서적, 진화론적 동기에서 한 발짝 물러나 부모가 되는 일의 재정적 측면을 고찰해 보도록 하자.... 미국의 중산층 가정에서 아이 한 명을 18세까지 기르는 데 약 25만 달러의 돈이 든다는 연구 결과가 있지만, 실제 그 액수는 경우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이 추산가는 대학 등록금, 결혼식 비용, 차나 집을 장만하는 데 지원해 주는 비용 등과 같이 자녀가 18세를 넘긴 후에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비용을 포함하지 않은 금액이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아이를 갖는 일은 마이너스의 순현재가치를 갖는 결정이다.- p.208

 

마찬가지로 연명치료나 치매 노인 케어 등에 대한 결정도 비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엔 사랑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공정한 가격표를 위해

우리의 목숨 값이 각자 다르다는 건 잔인하지만 현실이다. 또한 목숨 값이 높을수록 더 많은 보호를 받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냥 돈을 많이 벌면 목숨 값이 더 많이 쳐지니까 돈만 많이 벌면 되는 걸까? 저자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당부하고 있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지만, 소중하다고 해서 가격이 매겨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생명에는 매일같이, 끊임없이 가격표가 부여된다. 생명 가격표는 대개 불공정하다. 생명에 가격이 매겨질 때, 우리는 반드시 그 가격표가 공정하게 매겨지도록, 그래서 인권과 생명이 언제나 보호되도록 애써야 한다.-277p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은 연구가 필요하다. 한국은 의료보험 체계가 비교적 안전해 미국과 달리 많은 이가 의료 혜택을 받고 있지만 보상금, 양형, 임금 등에서는 충분한 근거 없이 목숨 값이 정해지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너무 부당하게 차별받기도 하며,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역선택이 일어나 노동 강도나 경제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선심성으로 돈을 주기도 한다. 합리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정당하지도 않다. 모두가 납득할만한 합리성을 갖추고, 정당한 결과를 향해 가는 것. 말은 쉽지만 사실은 무척 고난한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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